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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걷다 (Walking in the Air)

  • 입력 2023.12.14 12:48
  • 기자명 진혜인(바이올리니스트/영국왕립음악대학교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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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계절의 변화가 시간의 흐름만큼이나 빠르게 체감되는 올해이다. 차가운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는 날 도심 속 곳곳은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으로 화려하게 꾸며진다. 미국의 모더니즘 시인 월리 스 스티븐스(Wallace Stevens, 1879–1955)의 시에서 “우리가 모두 겨울 마음을 가진 눈사람이 되어야한다(One must have a mind of winter)”고 말한다. 추위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심장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눈사람은 어느새 우리에게 겨울의 풍경과 정서 속에서 우리의 주인공이 되었다. 어린시절 눈사람이 비록 이내 녹아버릴지라도 눈사람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이상에 대해 어렴풋하게라도 믿음과 희망을 품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눈사람에 대한 기록은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밥 엑스타 인(Bob Eckstein)은 그의 저서 《눈사람의 역사(The History of the Snowman)》에서 중세 시대의 눈사람을 기록하였는데 눈사람 관련 최초의 문서는 헤이그 네덜란드 왕립도서관에서 발견된 1380년의 주변부 묘사였다. 눈사람에 대한 기록은 무려 14세기 중세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지금과 같이 눈이오면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눈사람을 만들었다고 한다.

눈사람을 담은 최초의 사진은 카메라가 발명된 직후인 1853년 웨일스의 사진가 메리 딜윈(Mary Dillwyn, 1816–1906)의 사진이며 현재 웨일스 국립 도서관 컬렉션의 일부로 전시되어 있다.

Raymond Briggs의 The Snowman에서 하늘을 나는 장면 Walking in the Air
Raymond Briggs의 The Snowman에서 하늘을 나는 장면 Walking in the Air

눈사람은 크리스마스 카드 장식에서도 자주 사용되곤 하는데 다양한 일러스트와 작품으로 남아있다. 그중에서도 1982년 단편 애니메이션의 화면은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중에서도의 주제가인 ‘워킹 인 디 에어(Walking in the Air)’는 크리스마스 시즌만 되면 다양한 버전으로 편곡되어 곳곳에서 흘러나온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어디서든 꼭 한번은 볼 수 있는 이 작품은 굳이 성탄절이 아니더라도 겨울밤과 잘 어울린다. 단편으로는 드물게 200만 달러의 제작비가 든 ‘대작’이며, 작품의 탁월함 음악과 영상의 절묘한 조화에서 빛을 발한다.

 

동화적인 색채와 몽환적인 음색

눈사람과 환상적인 여행을 떠나는 소년 James의 이야기를 다루는 이 애니메이션은 영국 출신의 세계적인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동화작가인 레이먼드 브릭스(Raymond Briggs, 1934-2022)가 1978년에 발표한 동명의 동화작품을 바탕으로 한 단편 애니메이션이다. 애니메이션은 다이안 잭슨(Dianne Jackson, 1941~1992) 감독의 26분짜리 단편이며, 영국의 지상파 방송 채널 4(Channel 4)를 통해 1982년 12월 26일에 첫방송 되었다. 이 작품은 1983년 뉴욕 국제 영화제와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1984년 시카고 국제 영화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여 작품성을 인정받기도 했다.

이 애니메이션은 대사 없이 캐릭터의 동작과 런던 신포니아(Sinfonia of London)의 연주로 전개된다. 모든 프레임은 파스텔과 색연필로 그려져 동화적인 색채와 몽환적인 느낌이 더욱 살아나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을 주어 크리스마스 카드의 삽화로도 자주 사용된다. 화려한 원색을 배제하고 은은한 파스텔톤을 살린 그림은 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디지털과 고화질의 실감 그래픽에 익숙해진 우리에게도 여전히 신선하게 다가온다.

Raymond Briggs의 The Snowman 그림들
Raymond Briggs의 The Snowman 그림들

채색된 프레임 컷의 연속으로 운율감이 느껴지는 눈사람의 움직임은 디즈니 작품에서도 볼 수 없는 만의 특징이다. 이야기의 후반부에서 소년은 북극으로 날아가는데 이 장면에서 영화의 주제곡인 ‘워킹 인 디 에어’가 바로 그 여행을 위한 주제곡으로 등장한다. 이후 둘은 눈사람들의 파티에 참석하는데 소년 만이 유일하게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눈사람의 리듬감 넘치는 움직임은 눈사람들이 단체로 춤을 추는 장면에서 돋보인다. 그러던 중 산타 할아버지(영국에서는 Father Christmas라 부른다)가 루돌프와 등장하고, 눈사람 패턴의 목도리를 건네받아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다시 하늘을 날아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에는 목소리 없이 오케스트라 악기 버전으로만 편곡되어 흐른다.

 

하늘을 걷는듯한 보이 소프라노의 음색

영화에서 사용된 이 노래는 영국 작곡가 하워드 블레이크 (Howard Blake, 1938– )가 작곡했고 세인트폴 대성당(St Paul's Cathedral)의 성가대원인 피터 오티(Peter Auty)가 불렀다. 작곡가 블레이크는 스노우맨의 연필 스케치를 보고 감명받아 무려 나흘 만에 작곡을 마쳤다고 한다. 음악 자체가 감정이 풍부한 언어이기에 가사는 곡 안에 내재되어 있다고 국내 초연 당시 인터뷰에서 밝히기도 했다. 이어서 그는 이 곡이 ‘단조-장조-단조-장조’ 식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슬픔과 기쁨이 포개져 있어 마치 인생과 같다는 작곡가의 한마디가 마음을 울린다.

이 곡은 1985년 미국의 장난감 회사 토이저러스(Toys "R" Us)의 광고에 사용하기 위해 재녹음되어 싱글앨범으로 발표되었는데, 당시 작곡가 블레이크의 추천으로 1980년대 유명한 보이 소프라노(Boy Soprano)인 웨일즈 출신 성가대원 알레드 존스(Aled Jones, 1970– )가 녹음하였고, 그의 맑고 순수한 보컬톤으로 발표 당시 영국 싱글 차트 5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후 많은 아티스트들 이 다양한 편곡과 스타일로 이 곡을 다뤘지만 알레드 존스의 버전은 현재까지도 영국이 가장 사랑하는 크리스마스 음악 중 하나로 기억된다. 보이 소프라노의 맑은 고음은 마치 하늘에서 울리는 노래와 같다.

<스노우맨>은 세계적인 흥행을 기록한 애니메이션 영화에 이어 1983년에 나레이션이 첨가된 콘서트 버전이 무대에 올랐고, 이를 계기로 제작된 음반이 1988년 플래티넘 앨범으로 흥행을 기록, 1990년대에는 발레 버전의 <스노우맨>이 시도되었다.

비언어극 형태의 발레 버전 무대는 애니메이션에 사용된 음악에 30분가량의 새 음악들을 추가해 양적으로 풍성해졌고 1993년 영국에서 초연되었다. 한국에서는 2009년 예술의 전당 오페라 하우스 재개관 기념 공연으로 한국에 오리지널팀이 내한하여 국내 초연되었다. 한국에 초연된 가족극 형태는 1997년 버전으로 발레 안무가 더해져 버밍엄에서 무대에 올려진 스테이지 쇼이다. 가족극 형태의 발레 버전 <스노우맨>은 작곡가 블레이크가 음악과 가사를, 안무가 로버트 노스(Robert North, 1945– )가 안무, 빌 알 렉산더(Bill Alexander, 1948– )의 연출로 영국의 버밍햄 레퍼토리 시어터(Birmingham Repertory Theatre)가 제작했다. 춤과 마임, 음악 등이 가미된 가족용 뮤지컬 형태의 공연은 26년간 장기 공연되고 있고 매년 연말 영국 웨스트엔드의 피콕 시어터(Peacock Theatre)에서 하루 2~3회 공연되며 연말 흥행 1위를 기록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산타클로스보다 더욱 친숙한 캐릭터로 이 공연을 보기 위해 겨울마다 유럽 각지에서 영국을 찾기도 한다.

매년 겨울 영국 피콕 시어터에서 열리는 The Snowman 공연

공연뿐만 아니라 1994년에는 조지 윈스턴이 발매한 ‘Forest’ 앨범에서 <스노우맨> 의 사운드트랙을 피아노버전으로 편곡하였고, 플라시도 도밍고(Plácido Domingo)와 리카르토 코치안테 (Riccardo Cocciante)가 비엔나의 ‘A Gala Christmas’에서 이 곡을 불러 인기를 끌었고, 소프라노 조수미는 영화 사운드트랙을 엮어서 낸 앨범 ‘Be happy 2005 _ falling in love with movie’에서 ‘Walking in the Air<스노우맨>’를 수록하기도 했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삶을 살아가며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이 있다. 이제 많은 것을 알아버려 일어날 수 없을 거라 믿는 그 마법들이 영화에서처럼 눈사람의 손을 잡고 여행하며 기뻐하는 제임스의 눈처럼 깨끗한 표정을 보면 마치 잠시 접어두었던 그 마음이 되살아난다. 깊어지는 겨울밤 나만의 눈사람을 찾아 하늘을 걷는 상상으로 12월의 오늘을 마무리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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