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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수라 부르는 4가지 나무들

  • 입력 2022.08.11 12:00
  • 기자명 신종찬(신동아의원 원장/의학박사/수필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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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남해바다의 고요한 아침 안개와 경남 함안 말이산 가야고분군의 부드러운 곡선을 돌아보고 언덕 위 하얀 커피숍에 들렀다. 함안 벌판이 훤히 다 내려다보인다. 나뭇잎들이 한창 자라는 6월 6일인데도, 벌써 터질 듯한 붉은 열매들이 빼곡히 달린 정원수 가지들이 휘어져 있다. 산수유 열매만한 과일 몇 개를 따서 입안에 넣었다. 달콤하면서도 속에 씨앗이 있고 마지막 맛은 약간 떫은맛이다. 어릴 적 서리 내린 음력 시월, 산소에 시사(時祀) 지내러 가며 산길 옆 덤불에 지천으로 달려 있어 입안이 벌겋게 따먹었던 그 보리열매 맛이다. 전자는 일본이 원산인 ‘뜰보리수’이고, 후자는 우리나라가 원산인 보리열매가 달리는 재래종 보리나무다.

5월 14일, 아침 식사 후 우리는 가르미슈 파르텐키르헨으로 향했다. 루트비히 2세가 세운 여름궁전 린더호프성(Schloss Linderhof)가 거기 있었다. 독일에서 맛본 아침식사는 항상 저녁식사보다 좋았다. 아마 채소, 과일, 빵 등 식물성 위주의 식단이 입에 맞고, 특히 저녁 시사처럼 짜지 않은 탓이리라. 아침 햇살에 자상의 모든 것이 빛났다. 씀바귀 꽃들도, 민들레꽃들도, 제비꽃들도, 시냇물도, 독일가문비나무도, 보리수도, 백양나무도, 월계수도, 소나무도, 개암나무도, 떡갈나무도, 나뭇가지 끝에 매달린 초록 등불 겨우살이도....... .

린더호프성의 성문은 퇴락한 채 굳게 닫혀 있었고 관광안내소는 온갖 기념품들처럼 화려한 2층 목조건물이었다. 조용한 숲길을 따라 10여 분 걸었다. 우리가 첫손님이었다. 커다란 석주가 받치고 있는 2층 건물 정면의 삼각형 지붕은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놓았고, 그 앞 정원에는 금장식 인어 조각상이 아침 햇살에 빛나는 연못에 비치는 반영(反影) 또한 무척 아름다웠다. 갑자기 인어조각상에서 분수가 세차게 솟아올라갔다. 물줄기 높이가 20미터까지 올라간 것은 우리가 첫 관람객이라 환영하는 뜻이란다. 그러나 이 분수도 연못가를 지키는 300년 된 커다란 나무 꼭대기에는 미치지 못했다. 30미터도 넘어 보이는 이 나무도 보리수라 했다.

우리가 보리수라 부르는 나무는 4종류가 있다. 앞에서 말한 세 가지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펴는 그늘을 제공한 보리수(菩提樹)가 마지막 한 가지다. 이 나무 밑에서 부처님이 깨달음을 폈다 하여 ‘보디 브리큐사’라 하고 ‘깨달음의 나무’란 뜻이라 한다. 이 나무는 우리나라의 추운 겨울을 날 수 없으며, 식물원에서만 몇 번 보았다. 은사시나무 잎처럼 생긴 이 나무의 잎은 흰빛이 나는 검푸른 색깔이고 두꺼웠다. 여러 개의 작은 나무들이 모여서 큰 기둥으로 한 나무가 된 것처럼 아주 커다랗게 자라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 인도 보리수는 뽕나무과다. 종자가 작고 널리 퍼지기 때문에 광범위하게 분포하며, 인도에서는 불교신자뿐만 아니라 힌두교도들도 신성시하여 지나다가 이 나무가 있는 것을 보면, 신을 벗고 그 주위를 우측에서 좌측으로 5번 돈 다음 그곳을 떠나는 풍습이 있다 한다.

재래종 보리나무는 봄에 향기로운 황백색 꽃을 피운 후 맺은 열매는, 여름 내내 흰빛이 감도는 푸르면서도 노란 색깔이다. 이때 소복한 열매가 마치 보리알 같다하여 붙여진 이름이 보리나무다. 쭉정이 같던 이 열매가 처서를 지나면 서서히 살이 붙기 시작하고, 서리가 내리고 낙엽이 지기 시작하면 마침내 검붉고 통통한 먹음직스런 열매가 된다. 노루 같은 산짐승들이나 새들에겐 귀중한 먹이 감다. 산길을 가던 허기진 길손이 서리 맞은 보리열매를 한 움큼 맛보면 평생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을 것이다.

이 재래종 보리나무는 키가 크게 자리지 않고 덤불을 이루며, 가시처럼 자란 잔가지들이 촘촘히 잎과 열매를 보호하고 있다. 두꺼운 잎은 팽팽하지 않고 약간 쭈그러져 있으며 앞면은 푸르고 뒷면은 희다. 겨울에도 가지 끝에 작은 잎들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추위에 매우 강한 나무로 보인다. 따뜻한 해안가 언덕에서 자라는 보리나무는 상록수처럼 겨울에도 잎이 늘 푸르다. 재래종 보리나무는 사과나무와 같이 장미과이며, 추위에 잘 견디며 척박한 땅에도 잘 자라므로 사과나무 접목 대목나무로도 훌륭하다고 한다.

재래종 보리나무와 잎과 자라는 모양, 과일 맛이 비슷하지만 일본이 원산인 보리수나무를 ‘뜰보리수나무’라 부른다. 재래종 보리수처럼 가시가 발달하지 않고 나무 모양도 덤불로 자라지 않고 가운데 큰 기둥을 중심으로 자란다. 오래 자라도 키는 작은 키 나무에 머문다. 재래종 보리나무와 달리 초여름에 열매가 익으며, 열매의 크기도 재래종의 두 배 이상이다. 척박한 땅이나 화분에도 잘 자라고 열매가 잘 열리므로 요즘 정원수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숲의 나라 독일의 구릉지에 펼쳐진 숲에서는 소나무, 떡갈나무, 보리수를 3대나무고 한다. 그 중에서 보리수(Linde)는 ‘사랑의 나무’로 사랑 받고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보리수 잎이 사랑마크인 하트(♡)모양이기 때문이 아닐까. 로맨틱가도를 따라 여행하면서 본 독일의 고성이나 오래 된 교회의 대문 앞이나 뜰에는 어김없이 보리수가 자라고 있었다. 네케아 강가의 하이델베르크나 킴제 호수, 밤베르크 고성, 님펜부르크 궁전 해자 앞 등 어디에나 공간을 압도하는 키 큰 보리수 거목들이 무수한 초록 잎을 반짝거리며 5월을 지키고 있었다.

슈베르트의 연가곡집(連歌曲集) 『겨울 나그네(Winterreisse)』에 나오는 ‘성문 앞 우물곁에 서 있는 보리수’의 보리수(Der Lindenbaum)은 피나무의 일종인 유럽피나무이다. 이와 비슷한 찰피나무가 우리나라의 깊은 산속 추운 곳에 엄청나게 큰 고목들이 많이 있었다. 내가 전방에 근무할 때인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강원도 휴전선 근처에서 지휘관급 이상 장교들은 재임기간 중 이 피나무로 된 두툼한 통나무 바둑판을 여러 개 마련하는 것이 관례이다시피 했다. 전방부대 작전구역 내에 벙커 앞 사계청소를 한다는 명목으로 국유림에 자라는 찰피나무 거목들을 무단 벌목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중국에서도 인도 보리수가 자라지 못하므로 찰피나무, 또는 이와 비슷한 종을 택하여 보리수라고 부르며 절 주변에 심었다고 한다. 한국의 불교승려들도 중국을 따라 찰피나무를 심고 보리수라고 하며 그 열매로 염주를 만들어왔다. 불교에서는 이 보리수를 한국에서 야생하는 재래종 보리수와 구별하기 위하여 보리자나무라고 한다.

한국의 재래종 보리나무, 일본에서 수입된 ‘뜰보리수나무’, 슈베르트의 연가곡에 나오는 찰피나무인 보리수(Der Lindenbaum)와 뽕나무과인 인도의 보리수나무를 비교해보았다. 모두 인간에게 유익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문화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나무들이다.

슈베르트의 가곡 「겨울 나그네」의 첫 소절인 “성문 앞 우물곁에 서 있는 보리수”를 독일어 가사로 불러본다. 이 가사는 원래 빌헬름 밀러(Wilhelm Müller)의 시다. 거의 잊어버린 독일어이지만 이 노래가사만은 “암 브루넨 포어 뎀 토레 다 수텟 아인 린덴바움(Am Brunnen vor dem Tore da steht ein Lindenbaum)"로 아직까지 남아 있다. 산길을 홀로 가다가 이 노래를 부를 때면 젊은 날에 나를 버린 없었던 연인이 생길 것만 같다.

성문 앞 우물곁에/ 서있는 보리수

나는 그 나무 아래/ 단꿈을 꾸었네

가지엔 사랑의 말/ 새기어 놓고서

슬프나 기쁠 때나/ 찾아오는 나무 밑/ 찾아오는 나무 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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