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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죽나무와 장자

  • 입력 2021.12.07 11:43
  • 기자명 신종찬(신동아의원 원장, 의학박사, 수필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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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혜자(惠子)가 장자(莊子)에게 말했다. “내게 큰 나무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걸 가죽나무(樗木 저목)라 하더군요. 줄기는 울퉁불퉁하여 먹줄을 칠 수가 없고, 가지는 비비 꼬여서 자(尺)를 댈 수가 없소. 길에 서 있지만 목수가 거들떠보지도 않소. 그런데 선생의 말씀은 ‘이 나무와 같아’ 크기만 했지 쓸모가 없어 모두들 외면해 버립니다.”

출근길에 중랑천 따라 동부간선도로를 달리다보면, 키가 훤칠한 나무들이 드문드문 천변에 자라고 있다. 길게 뻗은 잎자루엔 스무 개 이상의 짙푸른 잎들이 넉넉하게 마주보고 달려 있다. 주렁주렁 달린 납작한 누런 열매들이 송이 채 가을바람에 흩날린다. 성장이 빠른 나무여서인지 가지도 몇 개 뻗지 않고, 미인의 다리처럼 미끈하게 자라는 모습이 사뭇 이국적이기도 하다. 돌 틈 사이에 제멋대로 자라는 걸로 보아, 심은 나무들이 아니고 절로 난 걸 알 수 있다. 만약 이렇게 자라는 나무들이 없고, 사람들이 심은 나무들만 있다면 얼마나 천변이 여유가 없어 보일까. 그런데도 현명하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혜자가, 가죽나무를 쓸모없는 나무라고 낙인(烙印)을 찍어버렸던 일은 너무했던 게 아닐까.

≪장자≫ 「내편(內篇)」 제일장(第一章) 소요유(逍遙遊)의 마지막에, 이 글의 서두처럼 가죽나무에 대해 말하고 있다. 장자와 친했던 혜자(惠子, 본명은 惠施)가 말한 것처럼, 예부터 저목(樗木)을 ‘쓸모없는 나무 또는 쓸모없는 사람의 비유하는 말’로 쓰고 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실제로 가죽나무를 곁에서 본다면, 도저히 그렇게 쓸모없는 나무로 생각할 수 없을 성싶다. 

그러자 장자는 혜자의 말에 이렇게 반기를 들었다. “선생은 너구리와 살쾡이를 아실 테죠. 몸을 낮게 움츠리고 놀러 나오는 닭이나 쥐를 노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높고 낮은 데를 가리지 않다가, 결국은 덫에 걸려 죽지요. 그런데 검은 소는 크기가 하늘에 드리운 구름 같아 큰일을 하지만 쥐는 잡을 수 없소. 지금 선생에게 큰 나무가 있는데 쓸모가 없어 걱정인 듯 하오만, 어째서 아무것도 없는 드넓은 들판에 심고 그 곁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한가로이 쉬면서, 그 그늘에 유유히 누워 자 보지는 못하오. 도끼에 찍히는 일도 누가 해를 끼칠 일도 없을 게요. 그런데 쓸모가 없다고 어째서 괴로워한단 말이오, ≪장자/안동림 역주, 현암사≫”

장자는 가죽나무가 사람들에게 쓸모없기에 오히려 쓸모 있다고 역설로 반론을 펴고 있다. 다만 장자도 사람의 입장에서 가죽나무를 바라보고 있지, 가죽나무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있지는 않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장자≫ 집해(集解)에서는 ‘두 사람의 대화에서 혜시(惠施)는 세상을 필요로 하고, 장자는 세상을 도피한다. 혜시는 장자의 말을 쓸모가 없다 하고 있지만, 장자가 무궁(無窮)에서 노니는 것을 모른다. 다시 말하면 장자의 대지(大知)와 혜시의 소지(小知)의 차이다.’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조금 다르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많이 아는 것과 조금 아는 것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이보다 혜시와 장자가 세상을 보는 관점의 차이가 더 커 보인다. 내가 장자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의 철학이나 논리에 모두 동조해서는 아니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 정말 독특하고, 모든 일을 한 번 뒤집어보거나 반대로 생각해보는 매력에 반해서다.

장자만큼 인간의 추함, 어리석음, 비굴함, 오만함을 꿰뚫어 본 사상가도 드물다고 한다. 그만큼 인간사회의 어두움과 험난함, 이지러지기 쉽고 뒤집히기 쉽단 점을 속속들이 파헤친 철학자는 없을 성싶다. 그는 면밀하면서도 냉철하게 인간을 응시한다. 정확하면서도 절실하게 인간 사회를 관찰한다. 장자가 밑바닥에서 파악한 현실이란 옴짝달싹 못 하게 묶여버린 인간의 비참한 ‘삶’이었다. 그의 초월 사상이 여기서 비롯된다. 인간이 짊어진 숙명적 부자유의 질곡으로부터의 해탈이라 하고 있다. 장자의 이런 시각은 우리를 ‘낯설게 하기’에 오랫동안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는 현대에 와서는 모든 문학이나 예술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낯설게 하기’란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러시아의 형식주의 문학비평가인 빅토르 쉬클로프스키이다. 그는 문학을 문학답게 하는 문학성은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과 관련된다고 생각했다. 이때 낯설게 하기의 방식에 의해 문학적 특성이 드러난다고 주장했다. 낯설게 하기는 시와 소설 등 그 장르적 특징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드러난다. 시에서는 일반적으로 일상 언어가 갖지 않거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리듬, 비유, 역설 등의 규칙을 사용하여 일상 언어와 다른 결합 규칙을 드러낸다. 소설에서는 사건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플롯을 통해 ‘낯설게 하기’를 시도한다.

가죽나무는 소태나무과의 잎이 지는 큰 키 나무다. 소태나무과로 중국이 원산지이나 우리나라에 귀화하여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소태처럼 쓰다.’는 말처럼 소태나무과이니 써서 봄철 어린 가죽나무 잎이라도 먹을 수 없다. 가죽나무란 이름은 참죽나무가 아닌 ‘거짓(假) 죽나무’라는 뜻이다. 같은 중국 원산인 참죽나무는 가죽나무와 비슷하게 생겼으나 잎이 가죽나무보다 더 녹색이며 나무껍질에서 붉은 빛이 난다. 가죽나무도 껍질이 적색이나 참죽나무보다 흰빛이 난다. 참죽나무는 그냥 죽나무라고도 하며, 봄철 어린잎은 두릅처럼 맛이 일품이다. 참죽나무에서는 향기로운 냄새가 나지만, 가죽나무에서는 소태처럼 쓴 냄새가 난다. 또한 참죽목재는 무늬가 아름답고 뒤틀리지 않아 악기나 가구재로 인기가 높다. 참죽나무는 나무 모양도 이름다워 가로수로 많이 쓰인다. 예부터 마을 둘레에 심어 잎도 먹고 목재로도 사용했다. 

이렇게 참죽나무가 세상의 경쟁에서 쉽게 승리하는 ‘엄친아’라면, 가죽나무는 세상의 경쟁을 힘들어하면서 살아남이야 하는 존재들 같다. 엄친아란 집안 좋고 성격이 밝은데다 공부도 잘하고 인물도 훤한 모든 면에서 뛰어난 ‘엄마 친구의 아들’을 의미하는 신조어다. 세상에는 사람들이 많다지만 잘난 사람들로 가득하다. 우리 주변에 ‘엄친아’들은 왜 이리 많은가. 이들과 비교될 때면 보통사람들은 절로 어깨가 움츠러든다. 어려움을 딛고 성공한 이들이 어디 하나 둘이던가. 그들의 이야기를 접할 때면, 못나서 손가락질 받는 느낌마저 든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질투만큼 행복을 해치는 감정은 없다.’고 했다. 나도 엄친아만큼 잘나고 싶다. 하지만 이게 어디 쉬운 일인가. 마음이 불편한 이유는, 남의 잘남이 곧 나의 못남으로 다가오는 탓이다. 남보다 뛰어나기 어려울 때, 우리는 흔히 질투에 빠져들곤 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질 리포베츠키는 질투의 정의를 ‘다른 사람의 불행을 보고 느끼는 건강하지 못한 기쁨, 그리고 상대가 유리한 조건을 빼앗기는 것을 보고 싶은 바람’이라고 했다. 남의 잘남은 나의 못남이다. 반면, 남들의 못남은 내게는 위안이다. 그래서 질투하는 마음, 앞서가는 이들을 끌어내리고픈 검은 욕망은 끝없이 피어난다. 질투에서 벗어나 편안해질 수는 없을까?

옛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놓고 자랑하는 것을 좋게 보지 않았다. 심지어 자기 자식을 ‘돼지새끼’라는 뜻으로 돈아(豚兒)라고까지 했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이 달라져서 자신을 돋보이게 하지 않고 겸손하기만 하면 경쟁에서 탈락하기 십상이다.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참죽나무로 태어나지 못해 가죽나무로 살고 있다. 내 조부님께서는 비 오는 날이면 농기구를 손질하셨다. 호미자루는 가벼운데다 맛이 써서 벌레가 덤비지 않는다며 주로 말린 가죽나무로 만드셨다. 언덕에 절로 난 가죽나무를 산사태를 막고 벌레를 쫓는다며 그대로 자라게 두셨다. 가수 ‘싸이’나 BTS가 최고급 음악은 아니지만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최고가 아니라도 남과 비교하지도 말자. 남모르는 내 못남을 누가 해결해줄 수도 없다면, 그냥 가죽나무처럼 씩씩하게 살면 되지 않을까? 누구라도 ‘내가 태어남’에는 ‘내 선택’이 조금도 작용할 수 없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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