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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鄕愁)를 전해주는 꽃, 아카시아

  • 입력 2021.06.02 08:10
  • 기자명 신종찬(신동아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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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경쾌한 뻐꾸기 소리에 5월 아침 창을 열면, 잊고 있었던 상큼한 향기가 창 넘어 들어온다. 아카시아 향이다. 산자락 어디엔가 함박눈처럼 아카시아 꽃들이 펴있겠지. 그 향기 따라 유년의 추억들도 따라 날아든다. 이젠 보리대궁들도 속이 비었을 테니, 보리피리도 만들어 불 수 있을 거야. 동구 밖 느티나무 꽃들이 개울 웅덩이에 조밥처럼 뿌려지고 있을 테고, 버들피리들이 이 꽃 먹으러 솟구치다 동그라미를 수도 없이 그리겠지. 오늘 학교 갔다 오는 길에, 동생과 개울물을 막아 검정 고무신으로 물 푸면 버들피리 녀석들 많이 잡을 수 있을 거야. 

아카시아 꽃들이 흐드러지게 핀 고샅길을 나와, 집채만 한 바위를 안고 몇 아름이나 자란 느티나무 당 숲을 지나면 들판 한가운데 아카시아 울타리를 한 우리 과수원이 나왔다. 막 저버린 사과 꽃은 콩만 한 사과들이 다닥다닥 열렸고, 울타리엔 새하얀 옥빛 아카시아 꽃들이 송이송이 달렸다. 한 송이 따서 먹으려면, 혀에 닿는 달콤한 맛보다 상큼한 향이 코로 먼저 들어왔다.

동구 밖 과수원 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하이얀 꽃 이파리 눈송이처럼 날리네

향긋한 꽃 냄새가 실바람 타고 솔솔

둘이서 말이 없네, 얼굴 마주보며 쌩긋

아카시아 꽃 하얗게 핀, 먼 옛날의 과수원 길 

박화목선생의 동요 〈과수원 길〉이다. 이 동요를 들으면 기억에서 멀어져 아련하던 옛 고향 정경이 떠오른다. 5월에 피는 흰 꽃들이 무척 많다. 그러나 아카시아 꽃이 가장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꽃이라 여기는 것은, 비록 나만이 아닐 성싶다. 찔레꽃도 5월에 피지만 아카시아 꽃만큼 흐드러지지 못하고, 향기도 아카시아만큼 진하지 못하다. 일본인들이 1890년대에 ‘아카시’란 이름으로 이 나무를 홍콩에서 인천으로 들여왔는데, 언제부터 ‘아카시아나무’로 부르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한다. 내 생각으로는 동요 <과수원길>이 인기를 얻으면서부터 ‘아카시나무’를 ‘아카시아나무’로 잘못 부르게 되었다가, 굳어졌다고 추측해본다.

우리나라 산림은 구한말부터 황폐해지기 시작했다한다. 게다가 전쟁을 위한 일제의 산림 수탈과 6.25동란을 겪으면서 심해져, 1950년대 중반부터 1980년 무렵까지 마을 근처나 도시 근처의 산들은 거의 민둥산이 되었다. 주로 땔감으로 나무를 많이 베어냈기 때문이었다. 중, 고등학교 시절 소풍가서 찍은 사진 배경 민둥산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정부는 헐벗은 산에 나무를 심는 사방사업에 나라의 온 힘을 기우렸다. 이때 아카시나무와 오리나무를 우선적으로 심었다. 이 두 나무는 척박한 땅에도 잘 자란다. 특히 콩과식물인 아카시나무는 뿌리혹박테리아가 있어, 공기 중 질소를 고정하여 땅을 기름지게 한다고 교과서에까지 나왔다.

아카시나무는 또한 꿀벌들에게 소중한 꿀을 주는 밀원(蜜源)으로 우리나라 꿀의 70%가 아카시 꿀이라고 한다. 아카시나무는 노란색으로 무늬가 아름다워 최고의 가구재인 느티나무와 동급이다. 또한 척박한 땅에도 잘 살아남고 아주 빨리 자라, 부족한 땔감을 쉽게 공급할 수 있는 나무로는 아카시나무만 한 나무가 없었다. 특히 아카시나무는 콩과식물 특유의 나무기름이 있어, 한 번 불이 붙기만 하면 절단면에 노란 기름까지 나오며 마르지 않아도 잘 탔고 화력도 무척 좋았다. 나무꾼들은 땔나무로 주로 아카시아를 베고, 소나무 같은 재목감으로 쓸 나무들을 아낄 수 있었다. 

내 증조부님(1885년 생)과 조부님도 겨울이면 주로 아카시나무를 땔나무로 해오셨다. 시골 5일 장에는 아카시나무 가시를 무력화시킬 수 있는 가죽장갑이 불티나게 팔렸다. 내가 어렸을 때 시골 어른들은 분명히 ‘아카시나무’라 하셨다. 그런데 학교에서 동요 <과수원 길>에서 아카시나무가 아니라 ‘아카시아나무’로 배워 혼란이 왔다. 나는 속으로 ‘아카시아’보다 ‘아카시’가 짧으니, 짧게 말한다고 철없는 결론을 내렸다. 주경야독(晝耕夜讀)하시던 내 증조부님께서도 나무하고 고기 잡던 일제 초기의 농촌생활 모습들을 가까운 일가(一家) 형님의 <정헌유고(定軒遺稿)>에 찬(讚)하는 한시(漢詩)로 남겨 놓으셨다.

성기온아행겸인 아족여공유기인

(性其溫雅行兼仁 我族如公有幾人)

성품이 온아하고 행실은 인을 겸했으니, 

족친들 중 공과 같은 분 몇이나 있겠는가?

한묵정공승구저 어초별업둔오신

(翰墨精工繩舊渚 漁樵別業遯吾身)   -하략-

글과 글씨는 정교하고 옛 명필들을 이으셨으나,

별업으로 고기 잡고 나무하며 몸을 숨겼다네.

진짜 아카시아는 나일강 주변이나 호주와 같은 열대지방에 자라며 흔히 영어로는 미모사(mimosa)라 한다. 학명으로는 ‘Acacia dealbata’라 하고, ‘은엽아키시아’라고도 하며 수백 가지 품종들이 있다고 한다. 노란 꽃이 흐드러지게 피면 그 모습이 정말 장관이라고 한다. 며칠 전 강남구 내곡동 화훼단지 온실에서 실내에서 키울 수 있는 분재 아카시아를 만났다. 노란 꽃이 피었고, 잎은 아주 작아 흔히 신경초라고 하는 미모사와 같았다. 

흔히 아카시아라 부르는 나무는 진짜 아카시아가 아니며, 학명이 ‘Robinia pseudoacacia’이다. ‘pseudo’란 라틴어로 ‘거짓’이란 뜻이다. 이 나무는 올바른 이름은 ‘아카시’며, 북미가 원산으로 겨울 날씨가 추운 곳에서도 잘 자란다. 우리나라에서 아카시 꽃은 흰 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인천공항 가는 고독도로 주변, 영종도 구간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아주 붉은 꽃도 있고, 붉은 꽃, 연보라 꽃 등도 있다. 

우리나라에 처음 들여올 때 사태(沙汰) 난 언덕이나 헐벗은 산에, 속성수로 심어 땔나무로 베어 쓰려는 목적이었다. 게다가 번식력이 좋아 햇볕이 잘 드는 곳이면 잘 자라며, 특히 무엄하게도 잔디로 잘 다듬어 놓은 묘소에 뿌리나 씨로 왕성하게 번식하였다. 이에 화가 난 효자들을 위해 아카시나무만 죽이는 농약까지 개발되었다. 그러나 아카시나무는 30년 이상 살기 어렵다. 근교 산을 오르다보면 죽어서 절로 넘어져 있는 아카시 거목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최근에는 여름에 잎이 노랗게 변하는 원인불명의 황화병(黃化病)까지 생겨 아카시아나무들이 크게 줄어들어, 양봉가(養蜂家)이 무척 걱정하고 있다. 숲 가꾸기 모범인 독일에서는 아카시나무를 고성(古城)의 뜰이나 유명한 공원에 심어 아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여행하며 알았다.

최근 지구 온난화로 봄이 일찍 찾아오고 있다. 내 일기에 최근 3년 동안 4월 20일 경에 앞산에 찾아오던 솔부엉이 소리를 벌써 4월 9일인 어제 들었다. 산에 가보니 아카시나무에는 겨우 새잎이 돋아나려 준비만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올해는 5월도 되기 전에 아카시 꽃이 필 성싶다. 비록 아카시나무가 한국에 들어올 때는 땔감용이었지만, 이제는 소중한 밀원이자 고급 가구재로 자리를 잡았다. 게다가 고향 그리는 향수까지 전해주는 소중한 나무가 되어있다. 현대 정신의학자들은 향수는 병이 아니고 약이라고 한다. 슬픔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기쁨을 선사하며, 우울증을 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울증을 막아준다고 한다. 향수를 통해 우리를 절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처지를 위로까지 하는 아카시나무를 많이 심고 가꾸었으면 좋겠다. 5월의 아카시아 꽃그늘 아래서 코로나로 인한 우울증들을 치료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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