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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Episode]"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노사연 씨 막내 이모부(최대석 씨) 작곡 … 개그맨 활동 덕분에 가수왕 영예

  • 입력 2006.03.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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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동의 계절 봄이 왔다. 만물이 기지개를 켜는 계절이요, 만남의 시기이기도 하다. 결혼, 미팅, 입학, 입사 등 만남의 의례들이 줄은 잇는다. 우리 인생은 어떻게 보면 만남의 연속이 아닐까.이맘때가 되면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로 시작하는 노사연 씨의 <만남> 노래가 떠오른다. 부르기 쉬고 노랫말 뜻이 깊어 곧잘 불리는 대중가요다. 1948년 우리나라 정부수립 후 대중음악 50년사 베스트 50곡 중 40위에 오른 작품이기도 하다. <만남>이 만들어진 건 1986년,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이다. 그러나 세상에 발표된 건 3년 뒤인 1989년. 이 노래와 함께 모임 때 자주 불리는 해바라기의 <사랑으로>와 비슷한 무렵에 발표되었다. <만남> 작곡가는 최대석 씨로 노래를 부른 노사연 씨의 막내 이모부다. 미국서 사업을 하는 최씨는 노래엔 문외한으로 알려져 흥미를 더해 준다. 4분의 4박자, 슬로우 록의 이 노래 작사가는 박신. <만남> 가사처럼 많은 사람과의 적극적 만남을 통해 세상의 빛을 본 노래이다.1978년 단국대 성악과 2학년 때 MBC 주최 제2회 대학가요제에 출전, <돌고 돌아가는 길>(김욱 작사, 작곡/4분의 3박자, 왈츠 풍)로 금상을 받아 가수가 된 노사연 씨는 <만남>이 나올 때까지만 해도 무명에 가까웠다. 공부와 노래를 겸해야 하는 학생 가수인데다 이렇다 할 곡마저 없었다. 특히 대학교 신입생 시절 첫 미팅 때 자신의 뚱뚱한 몸매를 본 남학생이 던진 모멸감 섞인 말에 충격받아 결행한, 무리한 살빼기의 후유증도 한 요인이었다(노사연 씨는 태어났을 때 몸무게 4.8kg의 우량아였다).'성악을 하든지, 가요를 하든지 택하라!'그런 가운데 노사연 씨는 가요제 입상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담당교수의 부름을 받았다. '성악을 하든지, 가요를 하든지 택하라!'는 경고를 받은 것이다. 1977년 1월 경희대 성악과를 지망했지만 낙방, 2차인 단국대 성악과에 2등으로 합격해 공부하면서도 클래식보다 가요 쪽을 택해 가수의 길을 걷고 있었던 터라 결국 전과를 결심했다. 어릴 때부터 이모인 대중가수 현미 씨를 동경해 '노래를 해 볼까'하고 대학가요제에 지원해 입상한 그로선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국문과로 옮긴 노사연은 1983년 발표한 <님 그림자>(김욱 작사, 작곡/4분의 4박자, 트로트 풍)를 부르며 가수활동을 계속했다. 하지만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가창력은 인정받았으나 인기인 대열에 끼지 못한 것이다. 초대받은 행사장에서 다른 여자가수에게 출연 순서를 빼앗기는 등 자존심 상하는 일도 잦았다.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열심히 노래하면서 장기인 재치와 개그, 유머로 부족함을 메워갔다. 10년의 무명시절을 보내던 그에게 드디어 기회가 왔다. <만남> 취입과 방송 출연이 그것이다. 노래를 부르며 활동하던 어느 날 MBC-TV '일요일 일요일 밤에'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됐다. 때는 음반이 나온 지 한참 뒤의 일로, 거기서 여고 시절 첫사랑, 체육 선생님과의 만남 얘기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며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노사연! 너를 쭉 지켜봤는데…(아! 두근두근, 쿵쿵), 너 혹시… 투포환 안 해볼래?' 그 이후 사람들이 자신을 점점 어려워하며 자꾸 존댓말을 쓰더니 급기야는 상석으로 앉히더라고 했다. 노사연의 꾸임 없는 모습에 <만남>의 인기 또한 치솟았다. 1992년 <만남>으로 가수왕까지 올랐다. 노랫말처럼 '우연'이 아니라 그것은 가수 데뷔 10년 만의 '바람'이었다. 1957년 3월 3일 경남 마산시 오동동에서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 노양환 씨(1987년 작고), 어머니 김화선 씨(평양 출신으로 북한 원로무용가 최승희 제자)의 2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난 그는 6살 때 부친 근무지 이동에 따라 강원도 화천으로 이사, 그곳에서 자랐다. 화천초등-중학교를 거쳐 화천실업고 1학년을 다니다 춘천여고에 재입학했을 정도로 공부도 잘했다는 후문이다.